식물신화 속의 인간 신체가 평면을 상대하는 법
#1. 야자나무 꽃즙과 남자의 핏방울이 섞이어 한 소녀가 태어났다.
#2. 꽃은 위로 피지만, 아래로도 피어난다.
“인간은 돌에서 진화했다” 라고 박이소 작가가 그랬다. 돌은 지질시대의 질료니까, 생명의 창세부터 그리고 인간의 기원까지 우리의 사고가 굳어진 것에 비해 그는 툭 트였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는 쉬울지 모른다. 이희명 작가는 “인간은 식물로 역진화하고 있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인간도 있고 식물도 있으므로 이 역진화는 눈에 보이는 과정일 수 있고, 그러한 시간역행적인 실행은 새롭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적 저항성을 뚫고 인간과 식물이 연대해가는 모습은 의외로 그로테스크하고 의외로 신선할 수 있다. 왜? 아무리 아는 것이라고 해도 실제로 해보면 의외로 그러하다는 것, 이것이 회화의 퍼포머티브한 성격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희명 작가는 “인간은 식물로 역진화하고 있다” 라고 나직히 선언하는 듯하다. 그 역진화의 시작은 사람의 머리가 꽃으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꽃은 만발하고, 개별성을 잃은 다발이다. 복수성의 존재가 된 것처럼 사람의 머리는 가장 손쉽게 대체되고, 그에 따라 두 사람, 필시 연인일 듯한 두 사람, 이들도 대지에 뿌리를 내리듯 서 있고 서로의 손을 뿌리처럼 등 뒤로 맞잡고 있다. 나무들은 생태계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는 적자생존보다는 더불어 숲으로 함께 어울렁더울렁 살 수 있는 뿌리-촉각적 물류교환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을 갖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 나무가 동료나무들, 키작은 아기나무들에게 뿌리끼리 얽혀서 양분과 미네랄 그리고 고급정보를 공유한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숲의 기운, 숲으로 번져가는 기류가 이희명 작가의 평면 위에는 증식되고 있다. 거기에 인간은 해프맨[half-man]의 단계로 점점 빠져들고 있으며, 이는 인간사회에서 가장 안 좋은 상태로서의 식물-인간 상태를 재정의하고 있다. 식물-인간은 이제 역사 시대의 헤겔적 자유와 진보 같은 관념들을 벗고 지구적 시간의 규모를 따라 생명의 원초적인 흐름들로 거슬러 오르는 문지방[limen] 같은 존재이다.
이희명 작가의 회화는 숲이 있고, 그 숲은 여러 겹의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합적이다. 그 터치는 환시[幻視]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 관객이 어느 만큼의 거리에서 구성주의적으로 적극 개입해야 한다. 즉 객관적인 회화의 완성태로서 숲을 잘 그리고 싶다기보다 보는 자의 망막에 잎의 발톱이 날카롭게 할퀴어서 회화의 가능태로서 전체 세계관을 수용하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숲의 세계관은 하늘이라든가 진리라든가 하는 오래된 철학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고,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는 등지고 있다. 여기서는 “사람은 식물이다” “사람의 머리는 꽃이다” “때로 사람의 몸은 달이다” 같은 식으로 동일률 – 즉 “A는 A이다”라는 등식 – 을 어기고 있으며, 그 복합적인 레이어의 숲의 섭리 속에 인간 자신이 변환되고 있다고 할까. 회화로써 그러한 변환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미 회화의 매체특정성은 소멸된 것이라는 동시대의 평결, 혹은 포스트-미디엄의 프로토콜이 작동하는 바운더리에서 다시 회화를 진행한다는 것은 이희명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의 얼굴 형상은 뭉크의 화풍에 미시모방된 듯 검은 마킹과 눈동자가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눈동자는 식물의 눈과 연대하고 있다. 눈[目]은 지구의 역사에서 식물로부터 태동되었다는 것이다. 나무는 봄이 되면, 무수한 눈들을 틔운다. 겨울이라는 인간의 시대에는 딱딱한 껍질로 뒤덮혀 역사라는 가혹한 시간들을 견대내지만, 봄이라는 생명의 시대에는 보드라운 눈길로 다시 신선해진 시간의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30억년 시간을 지구에 적용했을 때, 식물은 지구의 주인공이며, 기후변화의 재앙 이후 포스트휴먼이 인간절멸을 뜻한다면 다시 지구의 주인공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마치 이희명 작가의 비전은 그러한 유장하면서도 잔혹한 진실,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진실을 담아 때로는 루소처럼 때로는 달리처럼, 말하자면 기법들의 패치워크로서 미시모방하기를 주저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모르긴 하지만, 자신이 내다보는 오래된 태초, 혹은 이미 와 있는 극한의 미래를 환시[幻視]하려는 비저너리의 욕망이 기법으로서의 작가언어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꽃아, 꽃아 문열어라! 라고 어느 시인은 꽃숭어리를 붙잡고 다그쳤으며, 이희명 작가도 마찬가지로 꽃들의 꽃즙과 인간의 피액을 섞어서 식물-인간을 다시 한번 저 도저한 꽃들의 풍경, 식물들의 넝쿨과 정글과 맹그로브숲의 정경으로 들여보내는 것, 그럼으로써 그 꽃밭과 숲의 정경을 재창조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의식으로 개입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역진화의 과정과 식물-인간의 개입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가 아니라 누군가들이며, 말없이 아우성칠 뿐만 아니라 환청될 만큼 침묵의 왁자지껄이자 복화술의 무한 노이즈이다. 꽃들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무한히 작은 소리들을 보태는 듯하며, 그 꽃밭의 합창은 일률적인 듯하면서 변주변창이 있다. 동시에 그 꽃들은 ‘듣는 눈’을 갖고 있다. 아니, 꽃 자체가 ‘듣는 눈’이다. 소리를 우주적인 합창처럼 생명의 찬가로 증폭시키지만, 동시에 그 숲세계의 가장자리까지 퍼져나가는 소리들을 듣는다. 이 소리내기와 소리듣기는 이희명 작가의 회화에서 식물성의 저항이 갖는 감각적 자산이며, 식물성의 저항을 뚫고 인간들이 식물이 되어가는 과정의 체험이다. 그 소리들의 우주 없이 인간은 자신의 것과는 다른 눈[目]을 뜰 수 없고, 식물-인간이 되어가는 어두운 고통, 그 고통의 대가를 그 눈이 아니면 찾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들은 마치 ‘천사의 눈’처럼 무한의 세계로 열려지는 경계에 버티고 서서 여전히 인간과 식물 사이를 비끄러매는 판단불가능한 지대를 목도하고 있다. 이 목도 행위는 중간에서 중간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가볍게는 머리에 꽃을 장식하기도 하고 꽃밭에 머물기도 하지만, 무겁게는 머리가 꽃으로 화[化]해가기도 하고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 시대가 드리워진 듯이 어딘지 어두워져 가며, 심지어 의식 차원에서 지금까지 밀고왔던 자유라든가 그 확장으로서의 삶의 형식은 몰락해가고 있다. 이렇게 인간은 이희명 작가의 식물들, 눈들이 만개한 채 숨어있는 그 숲의 형국 속에서 되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어떻게 생명의 원류이자 그 원류로서의 식물로 회귀하고 있다. 식물화하는 인간, 식물-인간, 그리고 그 인간으로부터 상호적인 영향을 받아 점점 어두워지는 숲이 드러난다. 이 상호동기화된 풍경은 어딘지 태초의 광경 같기도 하지만,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묵시록 같기도 하다. 사실은 그 두 개의 무한한 시간대를 동시에 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희명 작가의 회화에는 눈들이 만개하면서 숨어있다. 저 아래로 어둡고 축축한 세계 한 중심부에는 어둠의 외투를 걸친 사람들이 은밀히 불꽃을 피워올리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눈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눈들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실제로 도처에 있다. 나뭇잎에도 있고, 꽃중심에도 있고, 틈새에도 있다. 나무 표면에도 있고, 대지 자체에도 있다. 그런데 그 눈으로서의 꽃잎들은 어느 쪽은 윗쪽으로 피어 있지만, 때로는 아랫쪽으로 피어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희명 작가에게 윗쪽으로 피어나는 꽃들은 섭리적이며 수직적이다. 반면, 아랫쪽으로 피어나는 꽃들은 연대적이며 수평적이다. 하늘을 향한 꽃들은 진리를, 진리의 꽃밭을 구성하면서 자족적이다. 땅을 향한 꽃들은 다른 낮은 곳의 생명을, 저보다 못한 처지의 생명무리들을 살피면서 빈 손을 건넨다. 이 후자에는 빈 손의 살결이 느껴진다. 무엇인가의 빈 손을 잡을 것이다. ‘천사의 눈’은 그러한 빈 손을 찾아낸다. 꽃즙과 피액이 섞이어 태어난 소녀는 자신의 몸, 토막난 부분신체, 그리고 몸의 우묵한 부분으로 그 땅을 향한 꽃들이 중국도자기도 되고 보석도 되고 곡식도 되는 생명변환의 선물을 나눠주었다. 그 소녀의 살결은 야자나무 가지의 껍질이었지만, 빈 손에게 건네는 선물은 달랐다고 한다.
여기에 전시 제목 ‘서정의 살결’은 인간이 없는 지구 규모의 시간 동안 식물이 눈을 가진 채 무상하게 살아왔고, 그 무상함을 보는 ‘천사의 눈’으로 지금 인간을 지켜보는 행위가 의외로 따뜻하다는 것을 암시하며, 이희명 작가가 오래된 태초나 선취된 미래를 디스토피아의 어둠으로만 보고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 무상하다는 것, 끝없는 순환이 이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견딜 수 없는 노릇 같지만, 이희명 작가는 그 생명의 우주성을 믿고 있으며 무한소와 무한대가 서로 손을 맞잡듯이 그 식물의 ‘천사의 눈’ 속을 통과해서 살결을 어루만지듯 자신의 회화 세계를 보는 이들에게 마찬가지의 체험을 하도록 내어놓는다. 즉 보는 것은 어루만지는 행위가 되는 것이고, 다시 한번 인간의 정서적 체험 속에서 이 식물-인간의 그로테스크 미학은 여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희망이자 기대일 것이다.
김남수(안무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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