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명 개인전 <당신의 비늘과 더듬이>
2024.11.01-11.24
수-일: pm 2:00- 7:00 (월, 화 휴관)
갤러리 인 HQ
서울 서대문구 홍연길 97
존재들의 소리로 가득한 숲
박영택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고밀도의 화면에는 무수한 상징적 도상들이 가득하다. 여러 개의 팔을 지닌 여신, 젊은 여자의 나신, 메마르고 갈라진 땅, 수직으로 솟구치는 고목들, 수많은 나방과 곤충들, 그리고 밤하늘의 달과 별, 만개한 꽃의 날카로운 수술, 또한 길고 가는 줄들은 네트처럼 펼쳐져 있고 이 줄에 의해 서로가 연결되어있다. 인간과 자연은 기묘한 모습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아니 인간에 유사한 형상을 한 기이한 존재들과 동물성의 육체를 부여받은 식물들과 달과 별들이 환하게 빛나는 어느 순간이 환상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바라보게 해주는 동시에 현실에서 벗어나 낯선 장소로, 떠올려볼 수 없는 생경하고 환각적인 장면으로 이끈다. 작가의 특이한 상상력에 의해 조성된 공간은 모종의 서사적인 이야기를 제공해주는 장소이자 보는 이의 시선에 차갑고 서늘한 비현실적인 영역을 펼쳐낸다. 신화와 동화의 한 장면을 풍부하게 연상시키는 풍경이 웅장하고 섬뜩하게 출몰한다.
작가가 상상해 낸 여신과 자연의 이미지, 식물성의 세계는 특이한 형상과 색채, 질감을 입고 나와 있다. 시각성과 촉각성이 포화 된 상태다. 화려하고 커다란 꽃들은 활짝 피어나있고 수술은 힘껏 밖으로 돌출되어 나와 다른 존재들에 겨냥되어 있거나 접속된다. 붉은 수술은 강렬하고 뾰족한 기세로 밀고 나온다. 동물성의 존재가 되어 찌른다. 그 기운은 강한 생명력 내지 개체의 존재감을 극대화하려는 듯하다. 그림 속의 모든 것들은 서로 촉지적으로 연결되어있다. 더듬이와 손, 꽃의 수술과 나뭇가지, 여신을 감싸고 있는 무수한 끈들이 다른 것들과 잇대어있거나 엉키거나 묶여 있고 박혀있다. 이 모종의 관계들은 인간과 자연, 신과 자연, 신과 인간의 거리를 그만큼 좁히고 조여준다. 동시에 그것들이 분화될 수 없는 상황을 암시한다. 여신은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한다. 여자(어머니)의 출산 능력과 대지의 생산력이 동질의 것이 되고 여신은 생명을 잉태할 뿐만 아니라 낳고 기른다.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하여 혹은 죽은 자의 부활을 위하여 스스로 지하세계 문을 넘고 저승의 세계로 들어가서 죽은 이를 부활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희망의 씨앗을 품고 스스로 부활하는 존재가 여신이기도 하다. 여신의 주변으로 수많은 나방들이 날고 있거나 붙어있거나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나방의 날개가 모여 여신의 얼굴 주변으로 몰려들어 후광을 만들거나 거친 나무껍질 위로 내려앉거나 부산하게 밤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나방은 떠도는 영혼의 흔적 내지 환생의 자취를 암시한다. 작가의 그림에서 달과 별, 나방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된 이미지다. 어두움을 밝히고 밤에 비상하는 존재들을 통해 모종의 희망을 드러낸다. 한편 갖가지 표피를 드러내며 자리한 나무들은 수직으로 치솟아 하늘을 가리거나 여러 겹으로 뭉쳐 꿈틀대면서 인간의 얼굴을 감추거나 마지못해 드러낸다. 새를 닮은 긴 부리와 뾰족한 돌기로 이루어진 가면을 쓴, 인간의 얼굴을 한 흰 몸통의 동물들은 나무들이 가득한 숲을 배회한다. 삶과 죽음의 고비 사이를 고독하게 서성인다.
숲은 적막하고 깊은 늪이 되거나 다양한 생명체를 품고 있는 신비한 영역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 자연은 식물성이 아닌 동물성의 육체를 거느리며 출몰하고 꿈틀대면서 묘한 기운을 방사한다. 모종의 에너지로 가득한 숲속은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 혹은 식물이 경계를 부단히 지워가면서 그 모두가 하나가 되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된 어느 상황을 부여한다. 꽃들은 엄청난 생장력을 보여주면서 피어나고 그 주변은 둥근 원형의 도상과 늘어나 퍼져나가는 타원형의 도상들이 사방으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청각적이면서도 에너지와 비가시적인 힘들을 방사한다. 작가의 그림은 공통적으로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장면에 온갖 생명체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것들은 강력한 힘을 지니면서 진동한다. 그러한 에너지의 시각화가 이 그림에서는 중요해 보인다. 작가는 무수한 타자들과 공존하는 상황에서 그것들과의 진정한 접촉, 연결을 꿈꾼다. 동시에 피할 수 없는 고립감을 껴안는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서, 타자의 존재란 풀리지 않고 공유만이 가능한 일종의 수수께끼라는 것이다. 이 “수수께끼를 함께 나누는 일,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조르주 아감벤) 이라고 부른다.
종이와 캔버스에 아크릴, 과슈 등을 이용해 그린 이 고밀도의 화면은 상당한 시간의 공력으로 쌓아 올린 색채의 지층으로 인해 단단한 표면을 거느린다. 정교한 그리기와 밀도 높은 표면의 효과로 인해 이 그림은 완성도 높은 회화적 볼거리를 간직하고 있다. 동시에 작은 규모의 입체물들 역시 그로테스크하고 환각적인 장면을 무척이나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갖가지 형상들과 신비한 자연 풍경, 그리고 입체물은 공상과학영화나 판타지 소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장면 등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고 동시에 자기의 내부에서 떠오르는 모종의 힘에 의해 건져 올린 것들이다. 작가는 자신이 구현한 그림의 세계 안에서 스스로를 치유하거나 위무하고 있다. 그림 안에는 모든 차별이 무화되고 달과 별에 도달하려는 간절한 희망들이 솟구치고 자신을 보호해줄 여신이 자리하고 있으며 모든 것들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정원/숲이 펼쳐진다. 고독한 자아를 보듬어주는 나무들과 꽃, 부산스럽게 일어나는 나방의 무리는 피어나는 자기 영혼의 등가물이고 작은 원형들은 고독한 자아를 대리하고 두터운 나무들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아 주고 있으며 가면은 얼굴 위에서 또 다른 페르소나가 된다. 숲은 에너지와 에코로 가득하고 달과 별과 기운들이 공진하는 공간이 된다.
신화적이며 동화적인 상상력과 판타지의 매력이 가득한 화면에는 무엇보다도 고된 그리기의 힘들이 저장되어 있다. 치밀한 묘사와 공들여 이룬 질감과 갖가지 표면의 맛들이 그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 회화의 피부는 생경하고 낯설어서 그만큼 개별성의 기운으로 가득차 보인다. 상상력에 의해 구성된 화면의 조성은 낯설음과 함께 이를 구현하는 표면의 기이한 질감의 맛과 묘사에서 오는 감각의 생경함을 안기면서 그 이질성을 극대화한다.
신화 속 신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또 사람을 다른 모양으로 변하게 하는 저주를 내리기도 한다. 이 그림에서도 자연과 인간은 변신을 거듭한다. 식물은 동물성의 육체를 거느리고 동물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자연은 활성적인 존재로 요동친다. 신화적 상상력이 이 그림을 지배한다. 따라서 그림은 사람들의 심성 밑바닥(무의식 또는 하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신화의 원형을 소환한다. 그것을 통해 잊고 지냈던 인류 문명의 여명기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까맣게 잊고 있었거나 혹은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인간 내면 속의 동물성과 야만성 등을 갱생시켜주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는 여전히 신화적인 것, 신성한 것, 동물적인 것, 식물적인 것, 인간적이지 않았던 순간들을 기억해낸다. 그 미분화된 상태에서의 어느 순간을 제시한다. 환상적인 목소리를 전달한다. 그 소리는 인간의 음성이나 언어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내지르는 비명에 가깝다. 이 세계를 이루는 모든 존재들의 간절하고 예리한 소리를 형상화하려는 시도가 이 작가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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