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노트 2021- 우연의 방>
이희명
사회의 거대한 급류 속에 부유하는 자아, 그 결여와 결핍에 대한 시선을, 식물을 통해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내 작업의 출발점이다. 2006년부터 피동적인 식물의 이미지에 동물적 특이성을 조합한 하이브리드 오브제를 필두로, 자아의 내적 갈등에 대한 표현을 다각도로 심화 시키고 있다. 최근에는 수직적 이원론의 사회 체계 속에서, 자아의 감성과 이성, 내면의 심층과 표층 사이의 균형과 조화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 노력하고 있다. 내면의 모양을 비추어 보며, 마음의 수평선을 찾으려 방황했던 흔적들은 나의 작품 안에서 그로테스크한 연출로, 때론 맑은 서정으로, 키치적이거나 전위적인 상상력으로, 고전성과 참신성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스타일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화법에 대한 고민들은 미지성의 표출로 전개되는 낯설은 실험과 고유의 자유로움, 재현과 비재현의 병존과 조합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면서 내면의 다층적 층위를 탐색하며 구현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풍경과 자아를 다루었던 지난 전시와는 대조적으로 자아의 방으로 시선의 무대를 옮겨보았다. 사회 속 하나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치열한 환경 속에서, 불안과 억압의 내적 수렴을 통한 균형감을 찾아야만, 이 불균등한 사회에서 나름의 조화를 만들어 적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성찰의 시간들을 포괄하는, 특유의 내밀한 감성을 발현시키는 소재로 심적 발원지의 공간인 내면의 방을 선택하여 이번 전시를 구상하였다. 특히, 전시 공간인 아트비트 갤러리는 가정집을 개조한 디자인으로, 각각의 방을 트여 만든 2층 구조로 되어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하여 이번 개인전의 주제 ‘우연의 방’을 기획하였다. 현실의 망망대해 앞에 홀로 선 자아가 마주하는 고민을, 의식과 무의식,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를 마주하는 조율과 응시의 방으로 다뤄보고자 하였다. 각각의 방을 만남의 방, 생각의 방, 생산자(창작자)의 방, 외톨이의 방, 정물의 방 등 5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내적 다층성의 표상을 구성하였다. 현실계의 거울인 지구와 원초성으로 대변되는 식물이 조우하는 방(만남의 방), 달과 지구, 식물과의 조합으로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하는 방(생각의 방), 생산, 창작 행위의 사색과 유희의 방(창작자의 방), 심적 침잠의 시공간과 고독의 방(외톨이의 방), 정물을 통해 자아의 그림자를 묘파하는 방(정물의 방)으로 나누어 회화와 설치 등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내면의 스펙트럼을 표면화하였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지구, 달, 식물과 자화상이 화면 안에 등장하여 중의적 의미를 담아내며 자아의 방을 그려내고 있다. 먼저 자화상과 지구와의 대면에서부터 전시의 도입부가 시작된다. 현재 자아는 중력에 사로잡힌, 자아가 만들어낸 개인 중심적 세계 안에 존재한다. 지구는 이러한 자아와 현실계가 마주하는 일종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서 자아는 원초성과 원시성, 미지성을 외연화한 식물을 직면하게 된다. 내면의 방 속에서 그려지는 식물은 비선험적, 비표상적 영역의 상징물로 사회 체계 안에서 기호화된 자아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대치하고 있다. 이러한 식물들과의 불안한 공존을 통해 견제와 절충을 거듭하며, 비가시적 세계와의 균형을 찾게 되는 과정을 ‘만남의 방’이란 소주제 안에서 작품으로 시각화 하고 있다. 그 후, 지구와 식물, 자아의 평면적 세계에서 달의 등장과 함께 혼재된 초언어적 세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생각의 방’으로 시선이 변모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지구의 의미와는 대립적 위치에 서 있는 달은 이상향, 유토피아, 니체의 초인과도 같은 완벽한 이상주의적 실체를 의미한다. 지구와 달, 식물, 자아의 파편으로 이루어진 변주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의식과 무의식의 대화를 이끌어낸다. 자아는 달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개인 중심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스스로를 응시하는 관찰자적 시점을 만들어내며 성장한다.
갤러리의 2층 공간으로 이어지면서, 달과 자아와의 관계는 ‘생산자의 방’에서 더욱 면밀해지고 구체화된다. 자아는 피안의 세계인 달을 마주하고, 간직하고, 보듬고, 그리고, 만들어보는 행위를 통해 무한한 영원의 흐름에 잠식된다. 그에 따른 마음의 발화와 행동들은 결국 화가가 실체화하는 언어이고 영혼의 실현이다. 달이라는 메타포를 반영하며, 자신의 꿈과 환상을 그려내고 회고하면서 자아는 희망과 욕망의 알레고리의 경계에 서있게 된다. 그리고 그 경계 사이에서 유토피아의 뒷면에 존재하는 디스토피아적 현실과도 직면하게 된다. 유토피아적 환상에 대한 양면성은 ‘외톨이의 방’에서 심층 속 불안을 자각하며 고독과 고립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불안한 자아를 대변하는 왜곡된 인물 형상, 분할과 재조립을 통해 물질화된 신체, 경계를 파괴한 초현실적 파편과도 같은 이질적인 산물들과 함께 작품으로 응축된다. 이 내적 침전물들은 ‘정물의 방’에서 주변 사물과 자아의 동화를 이끌어내며, 투사를 실체화한 오브제 작품으로 가시화된다. 정물은 필요성에 의해 놓인 도구 혹은 무의미한 배경과도 같은 침묵적 존재로 우리 주변에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정물과의 교섭은 자아=사물화의 능동적인 심적 교류를 통해, 사물의 외피 속에서 자아의 그림자를 동일시하는 투영의 세계로 인도한다. 재현을 탐구하는 미메시스를 거듭하면서, 사물의 본질적인 내피와 자아는 서로 맞닿으며 비재현의 세계로 전환하게 된다. 특히, 이 방의 회화 작품들은 검은 벽면을 바탕으로 꽃과 초, 낯선 특질의 사물들과 자아의 부산물이 맞물려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화법은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보이는 수직적 체계의 공허함에 대한 미적 형식의 현대적 차용물이다. 또한, 이 유한함과 대립하며 무한한 생명력과 시간의 축적을 상징하는 달과 돌을 주변에 배치함으로써 해석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2년 동안 이 5개의 방들을 구상하고 표현하며, 체화한 기법들과 설익은 시도들, 유예된 시간들이 합쳐져 확신과 불확신이 교차된 설렘이 작품 하나하나에 배어 있다. 회화가 만들어내는 가능의 세계를 모색하며, 자유로운 발상과 섬세한 화면 연출을 면밀히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아크릴과 과슈를 사용한 밀도와 채도의 강약 조절, 단계별로 레이어를 쌓아 올린 계단형 방식의 구상 표현과 함께 이미지 사이사이에 발현된 무의미한 추상 기법을 덧붙여 미적 자율성을 첨가하였다. 또한, 그로테스크한 설치작업을 이용하여, 회화 작업으로 가득 찬 공간에 실재감과 생동감을 주고자 하였다. 점토를 주로 사용한 설치 작품들은 신체의 조각과 식물, 돌, 새, 달 등을 병합한 이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응고된 이 오브제들은 자아의 파편이자 전위적 상상력의 고형물이다. 손으로 직접 점토를 빚으며, 촉각을 통해 세상을 느꼈던 순간들은 이성과 비이성의 충돌 속에서 만들어지는 우연의 영감을 고취시켰다.
이와 같은 시각적 실험들은 사고의 양태와 조형 언어 사이의 접점을 탐구하며, 창의적 표현의 화살표를 찾아가는 시행착오의 궤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궤적을 통해, 흔히 인식하고 있는 달, 지구, 식물의 형상에 사적인 상징들을 첨가하여, 공감과 이질감이 어우러진 마음의 눈을 전달하려 하였다. 나 역시 사회의 구성원 중 한명이고, 내가 표현한 사적인 관념의 형상화는 결국 개개인의 이면 중에 한 문장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경험이 안겨주는 심상의 세부들은 개인의 영역을 넘어 현대인의 자아상을 대리하며 서로를 정화하는 소통을 이끌어 낼 것이라 기대한다. 회화가 가진 소중한 의의는 작가만을 위한 예술, 시대착오적인 예술의 허세에서 벗어나 관객들과 작품 자체로 대화하려는 순결한 의지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열정과 시간의 지층으로 만들어진 이번 전시가 누군가에게 마음의 지평선이 될 수 있는, 내가 선택한 언어의 질감보다, 의도하지 않은 탄성과도 같은 순수한 메아리가 되길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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